잔디 깎는 철

여기서는 보통 4월로 접어 들면 여기 저기서 잔디 깎는 기계소리가 주말 아침의 달콤한 늦잠을 방해한다. 보통 일주일만 지나도 상태가 좋은 잔디는 금새 많이 자란다. 그리고 그 잔디 깎는 일은 (lawn mowing) 아빠나 아들들의 몫인데 바쁘거나 여건이 안되면 잔디 깎는 회사에 맡긴다. 그래서 산책을 할때 유심히 관찰을 해보면 어떤 집의 잔디는 꼭 푸른 카펫을 깔아 놓은 것 처럼 감탄사가 절로 나오고 또 어떤 집의 잔디는 클로버와 민들레 (여기서는 잔디를 괴롭히는 골치 아픈 풀로 여김) 가 반 이상 덮이고 너무 길게 자라서 마치 정글처럼 된 집도 있다. 그래서 봄만 되면 TV에서 풀 죽이는 약 (weed killer), 잔디 거름 (fertilizer), 풀이 잘 안자라게 하는 약 (weed controller) 등의 선전을 많이 볼 수 있다. 보통 잔디를 깨끗이 가꾼 집은 현관앞도 깨끗해서 아름다운 반면, 잔디가 엉망인 집은 칠한 페인트도 벗겨지고 앞마당도 쓸지 않아서 더럽다. 만약에 이웃집 잔디에 풀이 너무 많으면 그 풀씨앗이 날려서 자기 집으로 넘어 오기 때문에 잔디 관리를 못하는 이웃을 두면 골치가 아프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참다 못해서 자기 집 앞마당을 관리 하면서 옆집 잔디도 함께 깎아 준다든지 죽은 꽃이나 풀을 뽑아주는 등 남에게 봉사한다는 좋은 마음으로 해주는 경우가 있는데, 만약에 까다로운 이웃일 경우에는 큰 문제로 발전할수 있다. 왜냐하면 남의 property (소유지)에 주인 허락 없이 침범했기 때문이고 남의 소유물을 함부로 만졌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자기가 좋아하는 인터넷뉴스나 편지 서비스를 친구도 좋아 할것 같아서, 허락 없이 친구의 이메일 주소로도 그 서비스를 신청 했다면, 그 친구는 매일 들어오는 그 이메일이 반갑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종종 이민 온지 얼마 안 된 한국 주인이 자기집의 잔디를 깎으면서 옆집 잔디가 긴 걸 보고 양심상 어떻게 우리집것 만 깎고 획 들어가버릴 수가 없지혹은 이렇게 깎아주면 기뻐하겠지하고 허락없이 선의로 깎았는데, 마침 상대방은 개인적으로 어떤 계획을 갖고 앞마당을 예쁘게 단장 하려고 했거나, 잔디의 길이를 좀 길게 깎을려고 생각했는데, 옆집에서 허락 없이 아주 짧게 깎아버렸거나, 엉망으로 대충 깎아 놨다면 이웃에 잘해 줄려고 한 선의가 오히려 서로 말도 안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그래서 여기서는 당연히 그런 상태가 나쁜 잔디를 그냥 둔 이웃이 있으면 HOA (Home Owner Associate) 에 보고를 하고, 그 곳에서 경고 편지를 보내게 되고, 계속 시정이 안 되면 벌금도 감수해야 한다. HOA는 동네를 더 잘 유지 하기 위해서 집과 정원, 도로, 놀이터, 애완동물, 자동차 주차, 등등에 대한 주민의 불만을 받고 시정조치 하며, 그 동네관리를 위해서 매달 일정 금액을 징수하고, 일년 예산도 정하며, 눈을 치우거나 동네 조경을 위한 회사를 선정하는 일도 한다.

나 역시 비슷한 경험이 있는데, 퇴근을 하면서 이번 주말에는 아들 녀석도 한가하니 잔디를 깎으라고 시켜야지 마음 먹고 집에 왔는데 옆집에서 친절하게 잔디를 깎아줬다. 아마도 아들에게 시키면서 우리집것도 깎으라고 했던것 같다. 그런데 우리집 현관을 중심으로 양쪽에 잔디가 대칭으로 되어 있는데 한쪽편 만 깎여 있었다. 보통 잔디를 깎은 후에는 가장자리를 줄로 그으것 처럼 똑바로 쳐주고, 깎여나간 잔디들은 깨끗하게 쓸어줘야 되기 때문에, 주말까지 기다리기에는 보기가 흉해서 결국 피곤함을 무릎쓰고, 저녁도 뒤로 미루고, 안 깎인 반대편의 잔디를 혼자 깎았다. 옆집의 도움이 약간의 시간은 절약될 수 있었지만 왜 부탁도 안 한 일을 해서 사람을 피곤하게 하나 짜증을 내면서도, 직장 다니느라 바쁜 나를 생각해서 깎아 준 선의의 마음을 보고 이해하기로 했다.

올해는 특히 열심히 잔디에 신경을 쓰려고 마음을 먹고, 봄이 오기 시작하면서 mulch (멀취-나무등을 잘게 짤라서 나무나 꽃의 밑둥에 덮어주는 것으로 더운 여름에 수분이 빨리 빠지는것 막는 역할을 하는 것) 를 깔아주고, weed controller를 뿌리고 거름도 줬다. 그래서 올해 우리집 잔디는 다른 집보다 더 진한 초록빛을 띄고 빨리 자라고 있다. 그런데 큰 아들이 직장 관계로 집에서 먼 주 ()로 이사를 갔고 둘째는 봄이 시작되면서 어깨를 다쳐서 그냥 잔디 깎는 회사의 서비스를 올 봄 부터 받고 있다. 거의 모든 남자들이 하는 일을, 땀 뻘뻘 흘리면서 잔디 기계질을 하는게 싫고, 아무도 살려주지 않는 자존심, 내 스스로라도 살리기 위해서…

말 잘하는 사람들

항상 내가 여기서 놀라는 것은 어린이부터 어른까지 많은 사람들이 자기 표현을 너무나 조리있게 잘 말한다는 것이다. CNN이나 여러 주요 방송들의 대담프로를 보면, 여러명이 제각각 자기 주장들을 논리있게 펼치는 것을 보면서, 그리고 회사에서 회의를 할 때 직원들이 자기 의견을 조목 조목 아무 꺼리낌없이 잘 말하는 걸 보면서, 감탄을 하게 되는 때가 한 두번이 아니다. 어떤 경우에는 저런 말을 어떻게 감히 할수 있을까 놀라고, 또 그런 말을 해도 참 잘 경청 한다는 것에 또 한번 놀란다. 그러면서 어떻게 이 사람들은 마음 속에 있는 생각을 거침없이 술술 말을 할수 있을까 곰곰히 생각을 해봤다.

내가 생각하기에 우선 어릴때 부터 말을 자유롭게 할수 있는 환경을 가정에서 부터 마련해 줬다는 것이다. 내가 앞서서 언어 문화에 대해서 썼던것 처럼, 서로의 이름을 부르고 상대방을 “you”라고 하면서 동등한 입장에서 대화를 할수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가끔씩 외국 영화를 보면 어린 손자와 할아버지, 혹은 부모와 자녀들이 마치 같은 나이의 친구들 처럼 얘기 하는 장면이 나오는것도 이런 문화적 배경인 것 같다. 그리고 초등학교에서 많이 하는 ‘show & tell’ (자기가 좋아하는 물건을 학교에 가지고 와서 애들에게 설명해주면서 자랑할수 있게 하는 프로그램. 그러나 동물이나 위험한 물건은 금지된다.) 역시 여러 사람 앞에서 얘기를 잘 할수 있게 훈련 시키는 프로그램 중의 하나 인것 같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제일 큰 이유는 누가 어떠한 주장을 펼치든 명령 체계로 된 군대가 아닌 이상, 당사자의 마음에 들던지, 안 들던지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해 주기 때문에, 나이가 많거나 그 쪽 숫자가 더 많다고 윽박지르며 중단시키거나 야유를 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나의 경우를 보면 선천적으로 명랑해서 말도 잘 했을 것 같은데, 여러 사람 앞에만 서면 무릎부터 떨리기 시작하고, 무슨 말을 먼저 해야 할지 머리가 멍멍 해진다. 머리속에는 말하고 싶은게 많지만, 입으로 조리있게 나오질 않는다. 내가 나를 진단하기에 말을 하기에 앞서서 내가 너무 많은 생각을 하기 때문인것 같다. 우리가 어릴때는 사람들 앞에서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고 자기 생각을 좀 주장 할라 치면, ‘좀 점잖게 있어라’, ‘예의를 지켜라’, ‘철 좀 들어라’, ‘어른들 앞에서 까불지 말고 입 다물고 있어라’, ‘아무리 입이 가지러워도 좀 참고 조용해라’, ‘잘 난척 하지 마라’,  여자애가 좀 조용하고 차분해야지’, ‘체면 좀 차려라’, ‘딴 사람이 뭐라고 생각하겠니등등 말을 아주 잘하는게 버릇없는 것처럼 여겨졌었다. 그래서 말을 시작하기에 앞서 주눅부터 들고 상대방이 어떻게 생각할지를 먼저 머리에 그리게 되니 당연히 말을 잘 할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말을 잘하라고 보내는 웅변학원들도 하나같이 자기가 생각하는 주장을 논리적으로 말을 하게끔 가르치기 보다, 쓰여져 있는 글을 외워서 여러 사람들 앞에서 목소리의 높낮이를 잘 조절해서 소리지르면 잘 한다고 박수를 치곤 했다. 그러다 보니 아직도 선거에 나오는 한국 정치인들의 연설을 들으면, 초등학생들의 웅변만도 못 한걸 느낀다.

당연히 애들이 습관적으로 남을 비방하거나 상처주는 말을 하면 고쳐 줘야 하겠지만, 합당한 이유를 제시하며 합리적이고 논리 정연하게 말을 잘 하는 자식이 있다면, 아무리 부모의 의견이 그것과 달라도 끝까지 인내심을 갖고 들어줄려고 노력한다면 아이의 연설 잘 하는 재능이 빛을 볼수 있지 않을까 싶다.

한국에서도 요즘은 젊은 연예인들이나 대담 프로 진행자들이 우리 때와는 전혀 다르게 아주 말을 재미있게 잘 하는걸 볼 수 있고, 예전의 웅변학원과는 다른 방식의 스피치 클래스 (speech class) 들도 생겨서 각본 없이 스스로 생각하고 자연스럽게 말하는 걸 가르치는 것같다. 그러나 그 이전에 가장 중요한 것은 생각과 말, 그리고 말과 행동이 일치가 되지않고 진실성이 결여된다면, 아무리 말을 잘해도 행동이 따르지 않으니, 결국 그 사람을 신뢰 할수가 없을 것이다.

우스개 소리로 만약에 미국에서도 한국 처럼 뚱뚱한 사람이 길을 지나갈때, 야유나 조소를 보내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세계 최고의 미국 사람들의 비만율이 쬐끔은 떨어지지 않을까 하는 우스운 생각을 해본다.

딸의 첫 브래지어 사주던 날

많은 엄마들이 늙어 갈수록 딸이 있어야 된다고 하는 말을 자주 듣게 된다. 다행히 내게도 두 아들놈 외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예쁜 막내딸이 있다. 이제 조금 있으면 중학교 2학년이 되는데, 몇주 전에 모녀가 함께 쇼핑을 하면서 예쁜 무늬가 그려진 브래지어를 몇개 사줬다. 여기 미국 여자 애들은 초등학교 5학년 정도 만 되어도 성숙한 애들을 많이 볼수 있어서, 딸의 친구들을 보면 도저히 고등학생인지 중학생인지 구별이 가지 않을 때가 많다. 그래서 학교에서도 벌써 4학년만 되가면, 남녀 학생들 사이에 여러가지 주의할 점들을 가르쳐 준다.

딸 애가 난생 처음 갖는 브래지어에 너무 좋아서 어쩔줄 모르는 모습을 보면서,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 기억이 새삼스럽게 떠 올랐다. 우리가 어릴때는 요즘 처럼 보험제도가 잘 돼있어서 개인적으로 종합검진을 정기적으로 받는건 아주 부자가 아닌 이상에는 상상도 할수 없었고, 의료 시설도 좋지 않은 시대 였기 때문에, 그저 아프면 약국에서 약을 사다 먹는게 일반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학교에서는 정기적으로 전체 학생들을 대상으로 신체검사를 실시하곤 했었는데, 키와 몸무게를 재고, 치아 검사같은 아주 기본적 검사 외에, 손톱과 발톱, 머리에 이가 있는지 보는 위생검사도 했었다. 또 대변검사도 해서 회충, 촌충, 요충, 편충 등 기생충이 있으면, 구충제를 학교에서 선생님이 직접 보는 앞에서 먹게 하면, 아침도 못 먹고 온 가난한 애들은 그 독한 약에 견디지 못해서 구토를 하고 어지러워서 쓰러지곤 하는것도 보았었다. 그런데 그 때는 모두가 당연히 그래야 되는 걸로 알았지만, 딸 애를 키우면서 새삼 옛날에 우리 세대가 했던 신체검사에 대해서 다시 생각을 하게 된다.

당시 나는 다른 애들보다 키가 작고 성장도 빠른 편이 아니었지만 가난해서 학교에 늦게 들어오거나 다른 애들보다 성장이 빨라서 키도 크고 몸이 성숙한 여학생들은 벌써 5, 6학년 때부터 가슴이 나온 애들이 있었다. 그런 친구들은 항상 애들 놀림감이 되었고, 자기가 무슨 죄인인 양 항상 뒷자리에 앉았었고, 대체적으로 말도 없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런 신체검사를 하는 날은 남자와 여자애들 모두 똑 같이 팬티만 입고, 복도에 쭉 줄을 서서 키를 재고, 몸무게를 재고 했었는데, 가슴이 좀 나온 애들은 창피해서 두 손으로 가슴을 가리고 줄에 서 있으면 짓궂은 남학생들이 낄낄대며 웃었었는데, 그건 신체검사를 담당하는 남자 선생님들이 하는 행동에 비하면 아주 약과였다. 키를 재는 측정기에 올라서서 두 손으로 가슴을 가리고 있는 여학생에게 능글 맞은 웃음을 지으면서 막대기로 탁탁 치면서손 내려.” 하고 으름장을 주면 순진한 그 아이는 다들 쳐다보는 앞에서 선생님이 하라는대로 어쩔수 없이 겨우 손을 내리고, 차렷 자세로 키를 재면 애들이 다 ! ” 하고 소리를 질렀던게 기억이 난다.

나는 큰 딸로 오빠, 언니가 없어서 생각하는 것도 어리고 tomboy (말괄량이, 왈가닥 소녀) 같아서 그때는 그런 상황에 대해서 아무런 생각도 하지 못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당사자인 그 친구들은 얼마나 큰 정신적 상처를 입었을까 상상하니 딸을 가진 엄마로서 마음이 아파왔다. 허울좋은 신체검사라는 이름으로 겨우 키와 몸무게 정도를 재면서 엄청나게 비인간적이고, 미개한 성추행이 이루어 졌다는 사실에 소름이 끼쳐온다. 신문, TV, 인터넷등의 메스컴을 통해서 듣는 어린 소녀들이 당하는 상상을 초월한 성폭력 기사들을 읽으면서 동생들에게 여자 조카들 (요즘은 남자 애들도 조심해야 하는 세상인것 같다) 항상 조심하게 키우라고 강조에 강조를 하는데, 결국 모든 면에서 morality (도덕성, 윤리성) 가 사라져서 발생하는 현상인것 같아 무척 안스럽다.

빨리 빨리 문화

미국에 온지 얼마가 지난 어느날 수퍼마켓을 가서 필요한 물건들과 함께 한국에서 못 보던 상품들을 시식도 해 볼 겸 몇개를 사서 계산대에 주섬 주섬 올려놓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내 뒤에 선 남자가 갑자기 “It’s ok. Don’t rush. Take your time.”(괜찮아요.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해요.) 이러는게 아닌가? “아뿔사!”

내가 한국에 있을때 집 근처에 소형 백화점과 함께 아래층에는 수퍼마켓이 있었는데, 당연히 물건들을 산 후에는 계산대에 아주 신속하고 재빠르게 그 물건들을 척척 올려 놓으면, 나보다 속도가 더 빠른 여점원이 계산을 하는게 당연한 것이었고, 만약에 그 계산 속도가 좀 느리거나 물건에 문제가 있어서 점원과 한 마디라도 하려고 잠시라도 지체가 되면, 뒤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의 불평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런 일반적인 현상에 익숙해진 내가, 무엇에 쫓기는 사람 마냥, 나도 모르게 부랴 부랴 물건들은 계산대 위에 올려 놓는 것을 보고, 그 사람은 아마도 자기가 나를 빨리 빨리 계산 하라고 다그치는 것처럼 내가 오해한다고 생각 했든지, 아니면 작은 아시안 여자가 높은 계산대 위에 작은 한 손으로 잡기에는 큰 물건들을 (여기서의 일반 사이즈가 한국에서 치면 large size) 헐레벌떡 올려놓는 모습이 너무 안스럽게 보였던 것 같다.

지금 같으면 그렇게 좀 어색한 상황 아래라면 애가 학교에서 올 시간이라든가, 애들 데리러 가야 된다든가, 영어로 둘러 댈 수도 있었을텐데, 당시에는 영어가 금방 나오지도 않아서 혼자만 얼굴이 빨개져서 꿀먹은 벙어리가 되었으니

무의식적이고 습관처럼 나타나는 나의 재빠른 행동이 이런 인상을 남에게 준다면, 한국을 방문하는 외국사람들도 나 처럼 재빠르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 남자가 내게서 느꼈던 것과 비슷한 경험을 할 수 있겠구나 싶었다. 여기서도 동양 수퍼마켓들 (거의 한국주인이 운영하는 대형 매장들)의 계산대 풍경은 한국과 같이 아주 빠른 속도는 아니지만 아주 많이 다른것 같지 않다.

그 후 나는 아주 급한 상황이 아닌 이상, 되도록이면 모든 걸 천천히 여유있게 하려고천천히 말하고, 걷고, 생각하고, 판단하고, 운전하고, 등등노력을 하고 있지만 천성이 급하고, 어릴때 부터 그런 빨리 빨리 문화가 몸에 밴것을 나이가 다 들어서 한번에 고친다는게 쉽지는 않다.

요즘 처럼 거의 모든게 인터넷으로 이루어지고 초고속으로 가는 세상에서, 빨리 빨리문화는 많은 장점을 주고 그 덕에 한국이 많은 발전을 하고 있지만, 가끔씩은 일부러라도 느긋하게, 천천히 하루 일과를 지낸다면 아마도 정신 건강에 좋지 않을까 싶다.

WordPress Themes